10.26 비상계엄령 12.12 그리고 5.18
부제 ( 副題 ) 그때 그 시절..... 새삼 이제와서 아련한 상흔을 떠올려본다
비상계엄에 즈음하여....
2024년 12월 3일 10시좀 지나서
대통령의 특별담화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고 이어
계엄사령관의 포고령 발표가 TV속보를 통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비상계엄 선포 이후
드라마 틱한 일들이 실제 상황으로 속보를 통해 속속 보도됩니다.
꼬박 날을 새다시피 긴장속에 뉴스를 보면서
순간 어질함을 느꼈습니다.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인한 한차례 격랑을 치르고
이제는 수사와 헌재의 탄핵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 시민으로서, 개인적으로도
부디 부디 이 사태가 진영 논리를 앞세우지 말고 조속히 국민의 뜻대로
잘 해결(마무리)가 되어지기를 간절이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그때 그 시절..... 새삼 이제와서 아련한 상흔을 떠올려본다
저에게는
비상계엄에 관련하여 곤혹스럽고 황망하였던 사건 하나가
40여년동안에 깊숙하게 상흔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곡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서
40여년간 한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거의 잊혀진체 지내 왔습니다만
금번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당시의 애꿎은 상흔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려집니다.
사건 배경은
1979년 10 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이 발생하여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12. 12 사태 (영화 "서울의 봄"으로 상영됨) 의 혼돈 상황을 지나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됩니다.
이윽고 5.18 광주사태 (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었음) 의 소용돌이에
온 나라가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서 발단되어 시작됩니다.
당시에 적어놓은 수첩의 내용중 일부분을 간추려 봅니다.
(광주사태 당시 소상하게 적어놓은 수첩내용은 압수 되었고
이 글은 이후에 제가 겪었던 과정을 일기로 적었던 내용입니다)
1980년 5월 광주를 다녀오며 겪은 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부터 시작한 정국혼란은
12.12 사태를 거쳐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르고
광주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포항종합제철에 근무를 하는 중이었으며
광주에 계시는 부모님과 친지, 친구들의 안위가 궁금하여
5월 말에 휴가를 내어 광주를 다녀오면서 발생한 사연입니다.
비상계엄 사태로 광주로 진입하는 고속버스가 차단되어서
포항에서 출발 대구 - 대전을 경유 정읍에 도착했으나
통행금지로 인하여 부득이 접읍에서 1박을 하고서
다음날에 우여곡절 끝에 광주에 도착 하였습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 사유,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보도, 기록, 사진 등으로 아시는분들은 아실겁니다.
정황과 당시의 재 개인적 사안만 밝힙니다.
광주에 도착후 체류하는동안
곳곳에서 채집한 여러 사건과 정황을 수첩에 뻬곡하게 적었습니다.
( 어릴적부터 무엇이든 쓰고 베끼던 습관이 있어서, 이게 결국 사달이 되었습니다)
휴가 기간이 끝나고 광주에서 포항으로 돌아 옵니다.
광주에서 부산까지 고속버스로 가서 부산에서 포항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전남과 경남을 경계하는 섬진강 검문소에서 검문이 있었는데 적발 되었습니다.
(당시 20대중반, 하얀 남방에 소지품을 담은 007 가방을 들고 있었읍니다)
제가 수첩에 광주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깨알같이 적어놓은게
문제가 되어 적발이 된것입니다.
살벌한 시기에 섬진강검문소에서
검정색 지프차는 저를 호송하느라 싸이렌을 울리며 달립니다.
* * 보안대로 후송되어 조사를 받고
(뒤로 묶여 수갑이 채워진체 무릎꿇고 앉아
"구타" 라는 말을 생전 처음으로 체험 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천포경찰서로 이첩 되었습니다.
보안대에서 작성한 조서에
"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 전국을 배회하며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한죄 " 로
명기 되어 있음을 삼천포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며 알았습니다.
( 당시 감대중선생은 북한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획책 했다는 죄목으로
간첩 수괴로 체포된 상태였습니다)
포항에서 광주 가는동안 직통 고속버스가 운행이 안되어서
직행버스를 여러번 갈아타고 가느라 버스표가 여러개 주머니에서 나왔기에
전국을 배회하는 죄목이 되었지요.
그리고 수첩에 적은 내용은 사주를 받아 유언비어를 날조 하여 유포하고자
기록한것으로 지목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졸지에 불순분자가 되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고서
2일간의 조사를 받고 재 소환시 다시 조사 받는 조건 으로 풀려났습니다.
지금이 어떤세상인데 그런걸 적어가지고 다니느냐며 혼도 났지만
경찰분들은 어떻게든 제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광주에서 벗어나자마자 섬진강 검문소에서 체포 됐으니 유언비어를
유포 할수가 없었다고 간곡히 보안대로 보고서를 올렸읍니다.
그리고 알리바이는 포항경찰서 통해서 사유와 함께 확인이 되었지요.
그리고..... 얼마간 기간이 지났는데 재조사 소환을 연락받고
다시 삼천포 경찰서를 방문하여 조서를 추가 작성하고 엄중하게
주의 사항을 듣고 나왔습니다.
(저를 풀어주기 위해 여러 경찰 간부들이 심각하게 고민 많이 했다고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제게는 은인 같은 고마우신 분들 입니다)
조서 마치고 나오자 날이 어두워지고 긴장이 풀려서
지난번 그 여관에 들러 숙박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저를 안마해준 카운터 아가씨(조바)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하였지요.
그 아가씨도 저를 대뜸 알아보고선 반기면서 하는 말에 흠칫하였습니다.
여관에 첫 들어서는 순간 몰골을 보니 수상하고 섬뜩해 보였다는 것 이었습니다.
비쩍 마른게 눈만 퀭하고 비칠거리는게 자칫 여기서 죽어 나가면 골치 아플수도....
또는 혹시나 (직감으로) " 나쁜 생각 " 을 하려고 하지 않나? 하여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보며 살피느라 방에서 머뭇 거렸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겪은 사정 이야기을 듣고서 짠해서 정성껏 주물러 주었다고 하네요.
당시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주하는 집과 당시 근무하던 회사(포항종합제철) 까지
포항경찰서에서 다 조사를 해갔다고 한다.
속담에 " 잘 나가다 ** 포로 빠졌다" 는 말은 ** 포 시민들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습니다만 이해를 돕고자
표현을 그리해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후일에서야 알았지만 진주서로 넘어 갔으면 빼박 이었을거라며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합니다.
1980년 포항종합제철 근무당시
그때 그 시절....
새삼 이제와서.....
40여년이 지나서 그 기록을 다시금 꺼내어 봅니다.
부러 꺼내어 보려던 것은 아닌데요...... ( 뭐, 좋은일이라고..... )
금번 비상계엄 사태를 보면서 그때의 일들이 불쑥 떠올려 져서요.
그리고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웬지 한곳이 비어있는것 같은 그런 기분을
묵은 먼지 털어내듯 털어 냅니다.
2024. 12. 21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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