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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며 생각하며

남자의 향기

by 까망가방하양필통 2001. 2. 5.

브레히트가 쓴 시중에 이런시가 한편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 두려워 하면서........

이 시를 처음 접햇던 92년 가을,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무작정 떠난 여행길. 우연히 들렸던 어느 어촌의 허름한 카페에서였다.

실내 가득 은은한 커피향이 피어오르고 커피향처럼
조동진 노래가 흐르는데 여자 혼자 뿐 이었다.
그래서 주인인지 손님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는데
여자가 슬며시 몸을 일으켜 물잔을 들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안개처럼 어렴풋한, 도무지 어촌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나이는 스물예닐곱쯤, 처녀인듯 보였지만 다섯 살바기 아이가 하나 있었다.
알수 없는 여자가 알고 싶어 견딜수 없었다.

손님이 들지 않는 여자의 카페에서 사흘을 보냈다.
첫날은 여자가 끓여준 커피를 혼자 마셨고,
둘쨋날 여자가 끓여준 코코아를 여자의 아이와 함께 마셨고
세쨋날엔 여자의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여자와 함께 술을 마셨다.
술기운 탓이었을까? 여자가 사랑얘기를 했다.
더 할말이 없는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때였다.
여자가 믿어지지 않는 사랑얘기를 했다.
커튼사이로 퍼붓듯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바람이 두어차례 유리창을 흔들고
지나갔을 때였다. 여자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존재할수 없는 사랑 얘기를 했다.
그 남자가 가여워 내가 세번쯤 울었을때...."
오해 마세요 반드시 내 얘기라는건 아니예요" 여자가 쓸쓸히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곧 여자는 고개를 돌렸고 보라빛 치마위로 눈물 한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94년 가을,
나는 그 어촌의 여자의 카페 "풀잎"을 다시 찾았다.
사흘쯤 풀잎에 머물며, 사흘쯤 풀잎에 맺힌 이슬이 되어,
여자가 끓여준 커피를 마시고,
여자가 끓여준 코코아를 여자의 아이와 함께 마시며,
그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여자와 함께 술잔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맞게될 기나긴 밤,
창밖으로 퍼붓듯 달빛이 흐르고,
우리 사이에 더 할말이 없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때,
나는 가방속의 원고 뭉치를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할 참이었다.
"오핸 마세요, 반드시 당신 얘기를 썼던건 아니예요"
하지만 어촌 어디에도 여자는 없었고
"풀잎" 카페는 노래방 "불야성"으로 바뀐지 오래였으며
그 어촌 어디에서도 여자의 소식을 들을수 없었다.

하병무 장편소설 남자의 향기
오늘, 향수보다 진한 그 "남자의 향기"를
가까운 서점에서 만나 보십시오

밝은세상.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3가

 

 



몇년전쯤에 일간지 신문 하단에 5단통으로 나온 광고를 오려 두었던 것.
몇번이고 읽고 또 읽어 내리며 숱한 담배연기를 뿜어냈었던 기억이......
그리고 무신날.....홀연히 배낭하나를 챙기어 한적한 어촌을 배회하며
"풀잎"이라는 허름한 카페를 무던히도 찾아 보았지요.

사흘낮, 사흘밤을 꼬박 헤메어도 결국은 찾지 못했습니다.
비릿한 바닷가에서 퍼붓듯한 교교한 달빛에
괜한 서러움에 복바쳐 덜썩 주저앉고 말았답니다.

남자에게도 때론 그런 향기를 갖고플때가 있는가 봐요



2001. 2. 5
오랜, 낡아진 신문 쪼가리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가만히 보듬어 봅니다.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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