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24년 7월, 학전의 김민기대표께서 별세 하셨습니다.
당시에 전국적으로 많은 애도가 있었으며 저 또한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추모 하는 마음으로 김민기선생의 여러 자료를 스크랩하면서
시대의 풍운아 적인 면모를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축약하여 정리를 하면서 저보다 3살 위이신 김민기선생의 족적을
따라가면서 시대적 공감과 더불어 오랜 추억을 소환하여 봅니다.
( 아래 자료는 인터넷상에서 발췌한 내용중에서 이해를 돕기위해
편집 보완을 하였으며 이의 제기시에는 삭게 하겠습니다 )
김 민 기
출생.사망.국적.직업.수상
출생 : 1951. 3. 31, 전라북도 익산 |
사망 : 2024. 7. 21, 서울 종로 |
음악가, 연출가, 문화운동가 |
대표곡 : 아침이슬, 친구, 봉우리, 늙은군인의 노래, 아름다운사람,작은연못외 다수 |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한국뮤지컬대상, 괴테 메달, 더뮤지컬어워즈 공로상, 한국대중음악상,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
요 약
대한민국의 음악가, 연출가, 문화운동가.
197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품격을 높인 대표적인 음악가이자, 진정한 예술인이었다.
<아침이슬>, <상록수>, <봉우리> 등의 명곡을 작곡했고, 소극장 학전과 극단 학전을 세워
<지하철 1호선> 등을 공연하면서 많은 배우를 양성했다.
이 사진은 1993년 서울음반에서 제작한 <김민기 4집>의 앞면
초기 생애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였던 부친이 6.25 전쟁 중에 괴뢰군에 피살되어 모친 슬하에서 성장했다. 1953년
서울로 이주하여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했다.

이침이슬 - 양희은과 김민기

<아침이슬> 과 활동
중학교 시절부터 기타를 독학하는 등 음악에 관심을 두었던 김민기는
고등학교 시절 작곡했던 <친구>와 함께 <아침이슬>, <상록수>, <가을편지>, <꽃 피우는 아이>,
<눍은군인의 노래 > 등을 작곡했고, 특히 "아침이슬"은 기존 대중음악과 다른 가사와 포크 스타일의
곡이 주는 신선함으로 대중적인 주목을 받아서 1973년 정부에 의해 건전가요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꽃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김민기의 활동이 다른 의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에 수록된 음악을 작곡했으며, 이 때의 연극 제작
참여 경험으로 1974년에는 <소리굿 아구>의 희곡을, 1978년에는 <공장의 불빛>을 썼다.
1974년 입대한 후인 1975년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김민기> 1집도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1981년에는 경기도로 옮겨서 농사를 지으며 농산물 직거래 등 농촌 운동을 펼쳤다.
1984년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을 제작했다.
1987년에는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어린이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제작했다.
극단 학전 (學田)과 소극장 운영
1987년 서울의 봄을 맞아 신군부의 전제적인 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문화예술계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1990년 한겨레신문이 주관한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기획한
<겨레의 노래>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문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1991년 독일 폴커 루트비히 각본, 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한국어로 번안하고 연출을 맡아 자신이 개관한 소극장 학전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이무렵 소극장 공연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학전소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개명하고,
1996년에는 학전그린소극장도 개관했다.
2004년 이후 그는 대외적인 공식 활동을 자제하면서 학전 운영에 전념했다.

한국 대표 창작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이곳에서 4752회 무대에 올랐다
말 년
1991년 첫 공연을 시작한 <지하철 1호선>은 2008년까지 18년 동안 상설 공연된 후
4,0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으며, 2001년에는 독일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2007년에는 공연을 통해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독일 정부에서 수여하는 문화 훈장인
괴테 메달을 수여했다. 2010년을 전후하여 소극장 관객이 대형 뮤지컬 공연장으로 옮겨가면서
학전 경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결국 2013년에는 학전그린소극장의 문을 닫았다.
김민기는 2018년 9월 10년 만에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재개하여, 2023년 12월 31일 막을 내렸다.
이 무렵부터 김민기의 위암 투병 소식과 함께, 소극장 학전의 재정 문제로 인한 폐관이 결정되었고,
결국 2024년 3월 15일 학전의 시대를 마감했다.
김민기는 2024년 7월 21일, 위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 위 내용은 다음백과에서 정리하여 옮긴 내용이며
아래 내용은 인터넷상에서 살펴본 관련된 이야기와 회고담을 정리함 )
2024년 7월 21일 별세

김민기선생과 당시의 세대들이 겪어온 민주화 여정
( 해방후 지금까지 민주운동,의거, 혁명, 항쟁,민주화운동 )

함께 공유하여 살아온 시대와 더불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4학년 때의 모습
최초 음악활동 - 듀엣 도무리
1970년 대학에 입학했던 1970년 미대시절,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그림물감 값을 조달하던
그에게 친구인 김영세씨가 이미 고교시절부터 소문난 기타 연주자 였던 김민기에게 함께 노래할 것을
제안하여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도무리'라는 포크 팝 보컬 듀엣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학전 (學田) 이라는 못자리에 뿌리를 내린 모종들
(상상뮤직카페에서 옮긴글)
문화, 예술계 인재를 촘촘하게 키워내는 '못자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지내왔던
김민기 대표의 초심이 담긴 이름입니다.
그러나 경영난이 거듭되고 극기야 암투병이 겹치면서 결국 폐관하였습니다.
학전은 지난 33년간 359개 작품을 했으며, 배출된 배우, 연주자, 스태프만 780여 명에 달합니다.
또한 국내의 내노라 하는 스타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조승우, 이정은, 장현성과
김윤석, 유선 서영희 이선빈..등 굵직한 배우들이 여기서 기초를 다졌습니다.
학전 20주년 기념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다.
광석이가 처음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 그랬는데…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 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 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그때 김민기 형이 광석이한테 '세상에 노래 많다. 그 노래 중에 너에게 맞는 노래들이 있다.
그런 걸 찾아서 부르면 그게 네 노래다'라고 했다. 그래서 원래는 전인권 씨가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는데 민기 형의 권유로 광석이가 대신 부르며 함께 공연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등병의 편지'가 광석이 노래로 각인 된 거다"라고 설명했다.
1990년 '이등병의 편지'를 처음으로 무대한 김광석은 1995년 1,000회 공연까지 하게 됐다.
당시 김광석의 공연은 인터넷이 없어 표를 현장 판매만 하는 상황에도 사람이 몰려 문을 떼고
무대 바닥까지 사람들이 들어찰 정도였다. '학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황정민은
김광석의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의 줄이 혜화역까지 길게 이어졌던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수 장필순과 강산에는 "'학전'이 음악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았던 건 김민기 선배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같다",
학전 그리고 지하철 1호선
이 뮤지컬엔 청량리 588, 지하철 신문팔이, 운동권 대학생 등
90년대 말 서울 풍경이 담겨 있다.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은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의 전설이 됐다.
‘아침이슬’ ‘상록수’의 가수 대신 ‘학전 대표’로 불리길 원했던 김민기의 첫 뮤지컬 연출작.
그가 독일 뮤지컬 ‘Line1′을 한국어로 직접 번안한 극 속에는 베를린 대신 IMF 시절
서울의 풍속화가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4000여 회 공연 동안 73만명 관객이 들었고,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이라며 1,000회 차부턴 저작권료를 면제받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이 뮤지컬엔 청량리 588, 지하철 신문팔이, 운동권 대학생 등 90년대 말 서울 풍경이 담겨 있다.

가왕 조용필과 김민기의 만남
문득 가왕 조용필이 가장 존경하는 가수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형이 가장 존경하는 가수는 누군가요?’라고 물어본 거죠.
속으로는 신중현이나 김홍탁을 얘기할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깜짝 놀랐어요.”
그때 조용필이 입 밖에 꺼낸 사람이 바로 김민기였다.
전혀 예상 밖이라 돌멩이로 뒤통수라도 맞은 듯했다.
"그래서 ‘잘 아세요?’ 물었더니 ‘본 적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왜, 존경하는지?" 물어볼 수밖에야...
그러자 ‘신념을 가진 예술가들은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강헌은 "감동이었다”며 무릎을 쳤다.
(중략)
허름한 룸이 있던 카페에서 양주 한병을 놓고 ‘원샷’ 몇차례 한 뒤 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용필이 형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구석에 있던
낡은 노래방 기기 앞에 쪼그려 앉더니 번호를 직접 꾹꾹 누르는 거예요.
용필이 형이 마이크를 잡고 부른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이었죠.
‘벙찐’(어안이 벙벙한) 민기 형이 깜짝 놀라 용필이 형을 쳐다보았고요.”
가왕 조용필과 김민기의 만남 전체내용 https://shb9111.tistory.com/14141
김민기 노래의 가사해석
그의 노래는 누군가에게는 위로였고,
젊음이었고,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의 가사는 단순한 멜로디를 넘어, 삶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며, 청중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때로는 삶의 고뇌와 희망이 얽힌 복잡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옛사랑'은 세월이 흐르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곡은 애절한 멜로디와 함께, 사랑의 고통과 함께하는 순간들을 진솔하게 그려냅니다.
또한, 김민기는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곡에서는 사랑의 소중함과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내 마음은 황무지' 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과 그로 인해 황폐해진 마음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죽은 자의 노래'는 전쟁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한국 사회의
아픈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합니다.
김민기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아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의 가사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 출처 김민기 노래의 가사 해석|작성자 gwhuu )
보안사 취조실에서
2015년 5월 한겨레신문의 김민기 인터뷰 기사도 다시 회자됩니다.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전태일의 모범업체 설립 구상 ??
“김민기 선생이 전태일의 모범업체 설립 구상을 의식했는지 안 했는지는 몰라도
학전 운영을 전태일의 마음으로 운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한 연극계의 현실에서도 배우 스텝 모든 종사자들과 근로계약을 맺고
정확하게 계약을 이행하고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범업체 구상" 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물에 비치는 내 모습도 부끄러울까?
소아정신과인 서천석 박사님의 추모글도 김민기가 어떤 존재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언제나 선생님을 생각하면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과 ‘자화상’이 떠오릅니다.
얼마나 맑으면 우물에 비치는 내 모습도 부끄러울까?
그래서 늘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 길 원하셨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셨지요.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https://youtu.be/2n0L0IKgMMQ
가왕 조용필과 김민기의 만남 https://shb9111.tistory.com/14141
김민기 노래유튜브 https://youtu.be/GBW87J9aGhk
노무현대통령의 상록수 연주 https://youtu.be/Amw-fk4kmmE
아침이슬처럼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 우리문화신문=임세혁 교수 )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대학로의 극장 학전은 출신 배우들과 김민기의
영향을 받았던 음악가들의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진행하였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창립
33주년인 2024년 3월 15일에 폐관하였다.
한국 문화예술위원회가 인수하여 어린이 극장으로 개편되면서
학전의 이름을 유지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김민기는
인수된 극장에 학전의 이름이 쓰이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배움의 밭’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전은
대학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뒷것"에 대하여

2018년에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손석희 앵커와 나누었던 대담에서
“왜 이렇게 안 나오십니까?” 라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김민기는 자신은 ‘앞것’이 아니라 ‘뒷것’이라고 지칭을 하면서
노래를 만들었을 뿐이지 가수를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나서는 것이 불편하다는 대답을 했을 정도다.
민주화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고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가기도 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학전의 ‘뒷것’으로 남았다.

" 작년 한해 구석 하나가 아파왔던 걸 보면서 적어봅니다 "
" 참다운 예술인 김민기
매력 넘치는 예술혼, 피해가지 않는 사회 비판, 배움을 바로 세우고 옳게 사용하는 투철함
시대 정신을 이끌어가던 그가 작년에 생을 다 할 때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식물 한 폭인듯 생을 살았던 절박함 속에서도 아쉬움 속에서도 구차하지 않았던 그
오늘 날 예술을 한다 하면 주림을 각오해야 하는 현실을 저는 묵도하고 삽니다
많은 시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극인들의 배고픈 옷고름
사회성 가진 인기인 편애하는 얄팍한 현대인들의 남 보이기 전략과 맞물린 비극을 보았지요
작년 한해 구석 하나가 아파왔던 걸 보면서 적어봅니다 "
"뒷것" 김민기 학전 대표님에 대한 여러 자료를 살피면서
나서지 않고서 겸허하게 "뒷것"으로 스스로 자처하시며
옳곧은 성품과 신조로 연극, 음악의 발전에 소명의식으로 애쓰신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아침 이슬 " 노래를 웅얼거리며 마음속으로 모닥불을 피웁니다
아침이슬 / 김민기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2025. 6. 1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P.S
제 집사람의 폐암 수술은 무난하게 잘 마쳤으며
퇴원후 2주 간격으로 2회 진료를 받으면서 확인(체크) 을 한 결과
좋은 예후로 안정되었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초기단계 (1기) 이므로 항암치료는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6개월후에 전이및 이상변이등을 체크( 여러 정밀 검사) 하는것으로
예약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염려하여 주시고 격려 하여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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