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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며 생각하며

명동백작-이봉구의 명동이야기" -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by 까망가방하양필통 2012. 1. 26.

 

 

 

" 명동백작 명동이야기" -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서울역사박물관 ( 2 )      

 

                                       2012.1.23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 기획전시

 

 명동이야기(특별기획전시)를 둘러보았습니다."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라는 표제어가 깊숙하게 가슴에 밀착되어지네요.명동이라함은 그저 비싼 땅값에 유행을선도하는 최신, 고급의 사치적인 측면으로만 보아왔는데50-60년대의 명동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미쳐 몰랐던 애증을 보면서 진한 페이소스를 느꼈습니다.

 

명동이야기를 둘러보면서 "명동백작"이라는 이봉구(소설가)를 알게 되었고,예전 EBS에서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고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슴도 알게되었습니다..

 

무언가에 홀린듯.....연휴 이틀동안을  인터넷 검색에 흠뻑 빠지면서 미쳐 알지못했거나 건성으로 알았던해방후 40년대부터 전후 50-60년대의 명동을 중심으로한  문인들, 예술가들의  허무와 절망, 고뇌.....애증,그리고 이데올르기와  그 열악함속에서도  한잔술에 나누는 낭만적 서사시에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명동이야기 전시

서울의 소비와 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의 변쳔사를 되돌아봄으로써

서울의 변화과정과 역사를 이해하고 그 가치를 재발견한다는 주제임

이번 전시는 "명동백작" 이봉구를 그 축에 두고 명동의 뒷골목 선술집들과 다방에서

전후 시대인 50년대의 문인, 예술인들의  애환과 비애...그리고 낭만까지 조명하는 전시회였다.

 

 

 

 

 

 

 

                                 

                                       

 

명동성당과 저항문화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스크린

 

 

 

 

                                              공초 오상순선생의 일러스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여성국극

 

임춘앵(林春鶯,

1923년

~

1975년

)은

대한민국

의 국악인이다.본명은 효금(孝錦)로

전북

 

남원

출신이다. 일찍이

유성준

·

정정렬

에게 판소리를 사사하고

1948년

여성국악동지회를 조직하여 <해님달님> <반달>에 출연했고 그의 여성국악동호회로는 가장 인기있는 여성창극단이었다.

 

그 걸죽한 창과 힘있는 소리....그리고 짙은 화장을한 임춘앵님의 국극을 어렸을적에  실물로 본적이 있었다하여  또한 감회가 적셔지네요.

 

                 

 

 

                                                                           

 

 

원조 청일집

1945년 광복 직후 서울 종로 피맛골에 문을 열어 이곳에서 영업한 지 65년 된 ‘청일집’.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마라토너 손기정씨 등을 비롯한 정치인과 언론인, 문인, 스포츠인 등

각계 유명인사들도 많이 다녀갔다는 녹두빈대떡집임

 

(통째로 뜯어와 설치해놓은 실물임)

 

                   

 

                     " 고이얀 !  옷입어"  -  "속으로는 자기도 좋으면서"

                  

 

명동백작 이봉구, 조병화시인, 천경자화가

 

 

명동백작 이봉구

 

 

 

 

 

 

 

명동백작’, 그리고 늘 은성에 앉아있다고 하여 은성의 풍경화라고 불리는 이봉구는 1950~60년대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196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당시 예술의 메카였던 명동을 아우르며 

수많은 예술가와 교류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생전에 출간한 다섯권의 창작집 중 세권의 책제목에 명동

들어갈 정도로 그에게 있어 명동은 창작의 본거지이자영원한 예술공간으로의 노스텔지어였다

 

서정주 시인, 김수영 시인, 박인환 시인, 전혜린 수필가, 송범 무용가, 김백봉 무용가, 임만섭 성악가, 김동원 연극배우, 임춘앵 국극배우, 이중섭 화가 등 당시 명동을 제집 드나들 듯 했던 예술가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당시 명동이 어떤 의미의 공간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동방싸롱 앞에 자리했던 대폿집 경상도집

나애심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세월이 가면>이  즉흥적으로 만들어 진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댄디보이였던 박인환 시인이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그 시에 이진섭 작곡가가 음을 단 노래를

나애심이 즉석에서 부른 것이다.

일주일 후 박인환 시인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해 당시 명동 거리 전체에 이 노래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이 밖에도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주점인 은성,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뒤 

값싼 양주를 공급해 명동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포엠, 음악광들의 아지트였던 돌체

박인환이 운영했던 마리서사서점명동에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아지트들이 곳곳에 존재했었다.

 

이창용 PD“1973년 장충동 국립극장이 생기면서 시공관이 기능을 상실하고

1960년대 개발 붐으로 명동 역시 땅값이 치솟고 금융권이 들어오면서 당시의 다방과 선술집 등이 

유지를 하지 못해 명동을 떠났으며명동을 주름잡았던 터줏대감 오상순과 박인환, 전혜린 등이 

세상을 떠나 명동의 그 흡입력이 사라져 버렸다고 아쉬워 했다.

 

 

 

명동의 다방. 카페다방은 "종합예술의 장소"

 

6.25 전쟁이후  이렇다할 문화예술 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명동지역의 다방과 주점은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종합예술의 장소"로서 기능을 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모안것은 마땅히 갈곳도 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당시 추천제에 의한 문인등단 시스템도 한몫으로 작용하였다.

문인으로 등단하기 위해선 소위 "거물급" 문인들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했고,  화가들 역시 한장의 삽화를 그리기위해,

연극인들은 캐스틴이 되기위해 다방에 들려 정보를 얻고 일거리도 확보하려 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힘겨운.....

 

                               1940년대의 다방

                 

 

                    1950년대의 다방

                 

 

명동의 다방.....

위에 열거된 다방을 살펴보니  끼리끼리 형성된  그룹을  엿볼수 있다.

쟁쟁하신분들의 이름들이 주루룩..... 

 

떼아뜨르                                                                                 

   

 

포엠                                                                                        모나리자

   

 

                                                                                              돌체

                                                      

 

명동거리 벤치에 잠시 걿터앉아.....

 

 

 

  

2004년에 제작한 드라마  "  명동백작 "

 

 

'명동백작’ ‘은성의 풍경화로 불리며 많은 일화와 소문을 만들어냈던 소설가 이봉구..........  모더니즘 시인이었으나 후에 참여시인으로 시대를 표현하고 저항하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진정한 시인 

김수영...........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으로 유명한 시인이고 31세에 요절하며, 옷 잘입고 생각과 느낌이 쿨한 

댄디보이 박인환.........

순간순간을 불꽃같이 살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음독자살, 한마디로 범인과는 생각과 행동이 도발적이라 할 만큼 달랐던  천재 문학가 전혜린.........천재시인이며,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박목월 같은 당대의 대가를 김군, 서군, 조군, 박군 등으로 부르고 

다니며, 평생을 기행으로  살다간 오만한 기인 김관식.....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음에도 누구보다도 고단하게 50년대를 산 화가 이중섭..........

평양이 낳은 거물주먹으로써 월남한 다음에는 본인이 직접 싸운 사례는 극히 드물며 

명동파의 보스로 강자에 강하며 약자에 약한, 예술을 사랑하여 명동을 동대문 같은 시장터가 아닌 

문인들의 성지로 지키고자 한 건달아닌 건달 이화룡...........

이 드마는 위의 사람들이 서로 서로 엮어냈던 실제 이야기들을 토대로 잔잔히 이어졌었다.

 

 

 

 

 

 

가난한 예술인들이 펼치는 삶과 낭만과 우정, 가난한 그들이 마음놓고 차를 마시며술을 마실수 있었든 이유는 이들에게 인정을 베픈 명동의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동을 찾아오는 문인들이 좋아 50년대 중엽 

술집을 열고 70년대 초까지 외상으로 문인들에게  술을 팔았든 점 은성의 주인은 

최불암의 어머님이였다.

 

최불암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주점에서 외상장부를 찾아들고 외상값 다  받으면 부자가 될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꿈은 외상장부를 여는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고객의 체면을 배려한 최불암의 어머님은 고객의  이름을 모두 암호로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를 통해서 천재화가  이중섭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가슴이 저려온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이 청동 다방에 자리잡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문인들의 대부 같았든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에게 명동 백작 이봉구가 선생님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자 공초 오상순 선생은   저세상으로 갈때 가족에게 

짐이 될것 같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했다한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詩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잠시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세월이 가면(노래가된 시)/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명동백작’으로 불린 소설가 이봉구

 

6.25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부터 폐허의 명동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사람들은

술과 낭만을 사랑한 문화예술인, 특히 문인들이었다. 그들은 전후의 허무와 절망을 술로 달랬고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

박인환과 전혜린의 죽음은 명동의 전설이었다

천상병과 김관식의 기행은 명동 야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그 명동이 문단사에서 퇴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70년을 전후한 시기문단의 대표적 술꾼이며 명동의 터줏대감이었던 조지훈·김수영·김관식·김광주 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부터였다.

 

738월 말 명동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던 중앙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더욱 썰렁해진 명동 거리를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은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였다  깊은 쌍꺼풀 눈에 듬성듬성 자란 턱수염과 반백의 머리, 그런 모습으로 그는 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였다. 그의 앞에는 대개 막걸리가 그득하게 담긴 커다란 대접이 놓여 있었는데,

어느 한곳만 응시하다가 이따금 생각난 듯 한두 모금씩 벌컥벌컥 들이켜곤 했다.

 

이봉구가 명동에서 가장 많이 찾은 술집은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경영하던 은성이었다. 이봉구를 만나고 싶으면 누구나 은성을 찾았고, ‘은성에 그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누구나 궁금해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전혜린이 이봉구를 처음 만나 각별하게 친해진 곳도 은성이었다. 65110일 저녁 자살을 결심한 전혜린이 은성으로 찾아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이봉구였다. 왜 전혜린은 이승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이봉구를 선택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이봉구가 명동 백작으로 불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김수영 같은 사람의 요설이나 독설, 김관식 같은 사람의 천의무봉식 좌충우돌 등 시끄럽고 번잡한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와 술자리를 함께하려는 사람들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곤 했다.

 

명동 시절 그가 세운 술자리의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전한다. 첫째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 것, 둘째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 것, 셋째 돈 꿔 달라는 소리를 하지 말 것 등이다. 그래서 그가 동석한 술자리는 항상 조용하게 시작돼 조용하게 끝났다. 명동 술자리에서 그의 권위문인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인정됐고, ‘명동 백작이란 호칭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그 명동에는 일본인 아내와 헤어진 충격으로 失語症을 앓던 화가 李仲燮, 불교로 반쯤 탈속한 吳相淳, 독설로 유명한 청년 金冠植, 누추한 외모 속에 천재를 감추고 있던 千祥炳 등이 함께 어울렸다. 그 시절 은성이란 대폿집을 들르면 손님도 없는 이른 시각에  카운터 앞 지정석에 비품처럼 단정하게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신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소설가 李鳳九였다 

 

50년대,60년대의 명동 오상순,김수영,전혜린,서정주,고은,김광균,김광주,화가 이중섭,천상병 등... 아련한 옛날로 돌아가서 그들의 낭만을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그리고 아래 전재하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의 싯귀처럼 두눈을 부릅뜨고 술 한잔을 걸치면서...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피난지에서 귀환한 문인들은 구호물자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명동으로 몰려나와 초저녁부터 "술 취한 실존주의로절규하고 떠들고 왁자지껄해지는" 밤의 명동을 연출했다.그리고 그들은 "명동의 무너진 건물 사이의 길을 끼고 노천 주점에서 무겁게 취해"갔다고 高銀<1950년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이봉구의 책, " 명동 20" ]

 

그 지난날 명동의 마지막 교두보였던 은성술집에서 있었던 저자 이봉구와 수주 변영로 선생의 일화를 잠깐 들어보자."주량이 어느 급인가?" "아직도 형편없습니다" "그러면 애주?"  "그 급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그러면 뭘 했어?"  "죄송합니다" 이게 당시 그들의 대화였다.

   

<은성술집><봉구술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술집에 살다시피 한 저자 이봉구는

그 시절 명동 술집에 나와 시를 쓰고 사랑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현장 통신원처럼 현장음을 살려 생생하게 들려준다. 드라마에서는 김수영, 박인환, 김관식, 서정주, 전혜린이 주인공이었지만 이 책 속에서는 그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이 한 꼭지마다 돌아가며 주인공으로 불려나온다.

   

1945년 조국 광복 속에 명동 거리는 해방이 되었고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스산한 그 거리에 <봉선화>라는 이름의 다방이 첫 꽃을 피운 것을 계기로 하나 둘 떠났던 예술가들이 돌아온다. 1946년 봄부터 1949년 겨울까지 명동거리는 낭만이 넘쳐흐른다.

   

명동장, 무궁원, 돌체, 피가로는 명동 순수파들로 매일밤 대성황. 공초선생 오상순, 서정주, 그리운 옛 이름들. "어디로 가세요. 모나리자 아니면 문예싸롱? 그러면 돌체?-술 하시러?- 그러면 명동장 아니면 무궁원? -아이 참, 새로 난 딱총이라는 술집?" 길에서 만나면 이런 인사가 오고갔다.

   

술집 <모나리자>는 밤이면 중태에 빠졌다가도 이튿날이면 용하게 깨어나고 하는 예술가들의 주정을 

지겨워하는 마담은

"오늘 밤 주정은 어느 정도 어떤 스타일로 하실 심산이세요?'"고 먼저 묻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다 보니 젊음을 믿고 독주를 즐기던 사람들이 하나 둘 아깝게 쓰러진다. "노란 스웨터와 멋진 양복과 넥타이에다 캡을 쓰고 그 크고도 검은 눈동자를 두리번거리며 심각한 얼굴빛으로 

혼자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무슨 탐정 소설의 주인공 같아 

유심스레 두세 번 그를 힐끗힐끗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시인 김수영.

   

 

독일에서 막 귀국한 전혜린이 대학강의를 끝내고 검은 머플러를 쓰고 들르던 집도 은성이다연합신문사의 

문화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봉구와 전혜린은 오래 전부터 친교가 있었고,

그 둘은 약속 없이도 그곳에서 자주 만났다. 

알핀 바이올렛 전혜린도 빠질 수 없다. "선생님 저 색시 눈이 무서워요"누구?"" 잘 아시는 대학생. 머리를 

길게 늘이고  그 큰 눈을 두리번거리는 색시말이예요

", 저 색시. 법과대학을 다니고 있는 전혜린."

시시한 유행가 따위나 틀어주는  모나리자 말고 순 명곡 다방인 돌체에 가는 걸 좋아했던 천재소녀 전혜린.   전혜린이 다량의 수면제를 삼키고 세상을  떠나던 날 밤도

그들은 은성에서 만났고,그곳에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나,그 자리가 영결의 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 사이에서 '명동신사'이란 불리며 사랑받았던 박인환의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위스키를 마신다. 한 잔은 과거를 위해, 두 잔은 오늘을 위해서. 내일을 위해서는, 그까짓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노래했던 명동의 신사, 박인환   

그러나 박인환은 서른 한 살을 일기로 술을 마시고 돌아간 다음날 갑자기 숨을 거두어 버렸다.

친구들은 그 좋아했던 조니 워커 한 병을 죽은 박인환의 입에다 부어주고 자기들도 마시며 그리워했다. "유행가를 짓는 사람이라고 경멸한다면 명동 거리의 인사가 아니야" 라고 누가 말했던가.'명동신사'라고 불리우던 박인환은 불후의 명동샹송을 하나 남겼는데 바로 <세월이 가면>이 바로 그 노래였다.

 

박인환이 술에 취해 쓰러지고 동방싸롱 설립자 김동근이 뱃놀이로 빠져 죽고 김인수 또한 술잔을 손에 든 채

쓰러진다. 함대정이 죽고 조각가 차근호가 자살한다

천재화가 이중섭도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아는 얼굴들이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혜린의 죽음 후 김흥수가, 그리고 윤용하 여름날 굶주림에 허덕이다 산 밑 판잣집에서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박수근도 죽는다. ....."수주 가고, 또 공초가 가고!"

   

"그래도 궁금하다. 어디로 가야 그래도 아는 얼굴을 볼 수 있을까그렇지,은성에 가면 더러 만나볼 수 있지." 명동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순정지대의 주막>같다는 은성으로 몰려들고 그 곳은 명동의 마지막 

교두보가 된다 

 

 

이봉구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들은 너무도 가난한 나라에 그마저 예술가가 할 일도 별로 없던 

시절에 태어난 것이다.

할 일을 찾아 예술인들이 많은 명동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했고, 그 곳에서 시를 쓰고 원고를 청탁받고 원고료를 받으러 돌아다닌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술이었다"

   

 

이봉구는 다음과 같이 <명동 20>을 끝 맺는다.

   

"이제 다들 떠난 그 자리에 은성술집의 새로운 단골이 된 여대생이 이미 죽은 지 10년이 넘은 지금, 박인환의 명동 샹송 <세월이 가면>을 불러본다  "내가 운명을 같이해 온 명동 20! 그리운 그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 속에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잘 있거라 명동이여"

 

 

 


 

 

 

 


 

‘명동 백작’ 이봉구의 사진(위)을 인화하면서 김일주씨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말년에 수유동 자택에서 중풍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다고함

 

 

                            

명동백작 이봉구, 조병화시인, 천경자화가.....                         

상상일지라도 잠시 같이 1950년대의 명동 뒷골목을 거늬는 흉내를.....

 

                     

                                                                            

 

                                                     

서울역사박물관 - "명동이야기" 입니다.

제가 갓 태어나던 그 시절의 명동이야기 입니다.

알 턱도 없고,알수도 없고,알려고도 않았던 그 명동이야기......

우연하게  그 시절, 대한 늬우스에서나 봄즉한 이야기들을 접하고선 

설레임과 흥분에 충혈되었다고나 할까요.

헛허허허,  그렇다는게지요.

 

지금  덕수궁미술관에서는 우리나라 1세대 사진작가 임응식(1912 - 2001)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  사진 전시회가 있다합니다.  

곳에 가면 50-60년대의 풍경과  명동거리를  더 실감나게 볼수 있다고 하네요.

낼모레  토요일   그곳에 가볼수 있으려나 합니다.

 

 

2012.  1.  26.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P.S

박인희의 세월이가면....상상으로  음미하시기를....ㅠ.ㅠ

 

 

 

 

  • 수선화2012.01.27 15:40 신고

    명동...
    대학시절의 애틋한 추억이 묻어있는 곳입니다
    명동성당 뒷골목 허름한 가게에서
    튀김 한 접시와 막걸리담긴 찌그러진 주전자 앞에 두고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
    맥주집 시라노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던
    풋풋한 모습의 양희은.
    오랜만에 옛 추억에 잠겨봅니다.

    답글
  • 白夜(백야)2012.01.27 17:27 신고

    옛이야기 솔솔~~~~!!!
    마음속에 고이 담아 갑니다.
    행복한 저녁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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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들2012.01.28 06:22 신고

    명동은 내 젊음이 거리에 수놓아 있는곳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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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꽃앵초2012.01.28 07:14 신고

    우리네 촌부들은 그저 낭만적으로 생각하던 곳. 그 명동. '세월이 가면'을 흥얼거려 봅니다. 문학 공부를 하며 줄줄이
    일으켜세웠던 문인들의 이름이 고스란이 .....그런데, 정작 '이봉구'라는 이름이 낯설다 느껴집니다. 틀에 박힌 공부로
    그저 텍스트 속에 있는 공부를 하다보니 그런 것같습니다.

    가난하기도 했겠지만, 마음 속의 응어리를 풀어제낄 수 없는 문인들의 고뇌와 심성을 어찌 한 줄의 글로 표현 가능 하겠습니까. 술.술.술.....정초부터 끊었는데. 역시 글쟁이들은 술을 떼면 안되겠다...합니다. 시험공부만 아니면 그냥 올라가보고 싶은데...많이 아쉽습니다...좋은날이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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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망가방하양필통2012.01.28 18:58

      저도 명동백작 이봉구님은 첨 알게 됐습니다.
      기라성 같은 문인들 틈에서도 명동을 사랑하고 아우르는 그 행동이
      티 나지 않지만 거기 가면 언제나 그 사람이 맞아준다하여
      오히려 문인들 사이에서는 더 회자 되었던것 같습니다.

  • 나오미2012.01.28 19:17 신고

    찜 해두고 다시 만나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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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망가방하얀필통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행사에 다녀오느라
    늦은 밤에 들려서
    명동백작
    좋은 역사의 글에 쉬어감에
    감사인사 드리옵고
    오늘도 좋은 저녁을 보내시기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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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순희2012.01.29 08:07 신고

    아! 바람같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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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ky2012.01.30 13:03 신고

    은성 이야기를 할수 있는 곳이군요. 대학 초년생일때 즐겨 다닌곳이라 늘 생각나곤 합니다. 이봉구님과는 특별하게 알고 지냈기에 더욱 그리운 은성이지요. 대학 졸업하고 첫 교사발령 받은곳이 안성 여고였는데 교감선생님이 이봉구씨의 처남되시는 분이었고 그때는 이봉구씨 부인께서 돌아가신뒤라서 추석에 성묘 오시면 학교로 저를 찾아주셔셔 함께 고속버스로 오면서 많은 말씀 나눴었지요.
    김수영씨, 박봉우씨, 최불암씨 어머님, 이명숙여사(은성 주인)등등... 지나고보니 유명 예술인들이 많이 찾아오던곳이지요.
    무교동 송죽, 무진장등등. 그때 서울미대생들, 지금은 화가로 대학교수로.. 모두 은퇴했을 연세네요. 특히 큰키 아저씨도 생각나요.
    시인 김수영씨는 돌아가시기 전날 무교동 송죽에서 만나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일줄이야. 친구랑 술자리하면서 시에대한 좋은 말씀 들었었지요. 지금은 제가 그때 그분들 나이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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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ngky2012.01.30 13:07 신고

    대학때 사진을 임응식선생님한테 배웠는데요. 저는 사진모델로도 많이 찍혔어요. 머리가 허리까지 오게 기르고 다녀서 모델로 멋(?) 좀 있었나봐요. 여기는 미국이예요. 한국에 가면 꼭 가보고싶네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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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망가방하양필통2012.01.31 21:30

      덕수궁 임응식 선생님의 사진 전시회를 다녀왔드랬습니다.
      임응식 선생님이 계셨기에 백남준씨가 있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동이야기때에 태어난터임에 그 시절의 긴박함은 감히 느낄수 없지만
      다만 유추해보는 바입니다.

  • dada2012.01.30 16:53 신고

    이미~
    울, 필통님이 백작 아니신자요*^^*

    답글
  • 나비2012.01.30 20:00 신고

    명동의 역사를 죽 훝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존경하던 분들의 일대기를 잠시 읽을 수 있어서.........

    답글
  • 비후2012.01.31 08:42 신고

    저는 명동을 아주 자주 나갑니다.
    지금은 저런 곳이 하나도 없고
    일본이나 중국인들이 명동을 지키고 있는듯 해요.
    세월이 변하니까 받아 들여야겠지요?

    근데
    저 옛날의 명동과 어찌 그리 필통님이랑 잘 어울리는지요?
    찬찬히 둘러 봅니다.
    필통선생님!

    답글
  • 고 운2012.01.31 12:51 신고

    돌체다방.......
    눈을 감고 크레식음악을 청해 들었던.......
    긴 글 아낌없이 읽어내렸습니다.
    그리 멀지 않았던 얘기들.
    이젠 뒤란으로 사라지려하네요.
    2월입니다. 대설 소식도 들리고......
    늘 건강하시구요. ^^

    답글
  • 표주박2012.01.31 17:53 신고

    명동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그래.... 맞아... 맞아...
    사진속의 그 당시 그 풍경들이 죄다 다시 살아나네요.

    그당시에는 예술인들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장소가 다방이나
    주점밖에 없었거든요. 너 나 없이 입에 풀칠도 힘들때였으니..

    ...까 방...님 덕분으로
    전설이 되어버린 가난한 예술인들의 철학과 낭만과 예술혼을
    다시금 접하며... 아련한 명동 추억을 되새김합니다.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면....... 자주 부르는 노래여요....ㅎㅎ

    답글
  • 안개꽃2012.01.31 18:44 신고

    느른하게 그시절로 빠져드네요.
    모를 충만감.... 이를 어쩌나요.
    그분들에 휩싸여 끝없이 치솟던 그치기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ㅎㅎㅎ 안녕하시지요^^*

    답글
  • 푸른들2012.02.02 07:02 신고

    올들어 가장추운 아침.

    이 한파에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등산화에 완전무장 하니 다니기 괜찮더군요..

    체면보지 말고 벗님도 완전 무장하고 다녀 보세요...

    답글
  • palmer2012.02.02 13:40 신고

    부지런한 까방님 덕분에
    저도 지금 이봉구 조병화 천경자님 더불어서 명동 거리를 거니는 듯 합니다. ㅎㅎ 감사.

    답글
  • 산향2012.02.02 13:55 신고

    명동..
    다시 새겨 걷고싶어지네요.

    알려진 사람보다는
    잘 알려지지 사람의 행적들이 때론 가슴을 때리기도 합니다.

    많이 추워요~
    건강 조심하시길요^^

    답글
  • dada2012.02.02 20:50 신고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은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산길에선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상이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열
    조그만 가면 된단다
    안녕하세요 수인사하지만
    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반갑다 말하면서 이내 스쳐가버리는
    산길에선 믿을 사람 없다
    징검다리 징검징검 건너뛰어
    냇물 건너듯이
    이 사람도 아니다 저 사람도
    아니다 못 믿겠다 이 사람
    저 사람 건중건중 한 나절 건너뛰다보니 산마루 다 왔다
    그렇구나, 징검다리 없이
    어찌 냇물을 건널 수 있었을까
    아, 돌아가 껴안아주고 싶은,
    다 멀어져버린 다음에야 그리움으로 남는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으로 남는
    그 사람 또 그 사람......
    그들이 내가 도달할 정상이었구나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 산길에 나 하나를 못 믿겠구나

    (복효근)

    답글
  • 소우주2012.02.03 09:27 신고

    년일 강추위가 계속되는 날들에
    따뜻한 옷 두텁게 입으시고
    미끄럼 조심 하시며
    감기도 조심 하세요!

    건강한 하루하루들 !
    좋은 나날 만드세요!
    감사합니다.

    답글
  • 푸른들2012.02.04 07:00 신고

    오늘이 입춘 이네요..

    이제 봄 소식도 서서히 기지개를 피면..

    꽃소식 기다려 지지요..

    날씨도 풀린 주말 흐뭇한시간 만들어 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