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군 회천읍 회암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회암사지 진입로
멀리 뒤쪽에 천보산이
회암사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며 조선 전기에 이색(李穡)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
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합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회암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나 동기는 알 수 없지만, [명종실록(明宗實錄)]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
(명종21년,1566)"라는 기록이나 [선조실록(宣祖實錄)]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선조28년,1595)"의 기록을
볼 때 1570년 경에 유생들에 의한 화재로 회암사가 소실되면서 폐사(廢寺)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골짜기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 (奉先寺)의 말사인 현 회암사가 있으며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 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 (보물 제 388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습니다.
회암사지 입구에 당간지주
회암사지
저 멀리 끝부분에 회암사지 부도탑이 서있슴
디카의 한계^^ 더 안땡겨짐^^ 촛점도 흐릿하공^^
절터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망대에서본 회암사지
전망대에는 선사들의 영정 사진과 문화재가 소개되어있슴
회암사지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회암사터의 가장 북쪽에 서 있는 이 부도는 그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우 스님이나,
회암사 중창에 힘쓴 처안의 부도탑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상·중·하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에 휩싸인 말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고,
윗받침돌은 8부신장과 덩굴무늬로 장식한 후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감히...이정도 정교한 문양과 아름다운 조화,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부도로서
보물 정도로 지정되어야 마땅하지 않나 여기지만 전문가적 입장에서 보는 견지와는 다를수밖에....)
성터 잔해
회암사의 흥興과 망亡
불심이 두터웠던 문정대비(중종의 비, 명종의 어머니)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는
회암사에 머물며 숭유 억불정책하의 조선시대에 불교중흥을 도모한 장본인이다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이룩한 보우는 1565년(명종 20) 4월 5일
낙성식을 겸한 성대한 무차대회 (無遮大會)를 열었다. 그러나 이틀 후 문정대비가 서거하니,
때를 기다려온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그는 사월초파일날 제주도로 유배되어 마침내 제주목사
변협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와 함께 회암사도 불길에 휩싸여 폐사되고 말았다 한다.
이이의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에서 보여지듯 조선의 유가(儒家)들에게 보우는 요승이자 적승(賊僧)이었지만,
그는 본디 수도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종종 산천을 돌아보는 만행을 즐거움으로 삼던 '숨어사는 현자'였다.
그를 문정대비에게 천거한 것도 저잣거리에서 그와 어울리던 유가들이었다. 거부할 겨를도 없이 급작스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면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간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
라며 지배이데올로기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던것이다.
바로 적멸이라 하겠다
위 사진 4점은 김삿갓 기념사업회 카페 지기 임종혁님의 답사 사진에서 퍼온 사진임
(이의 제기시 삭제하겠습니다)
제가 방문시에는 관리인이 있어서 회암사지 안에는 둘러 보지 못했습니다
(답사 사진을 찍으실분은 오후 6시 이후에 방문하면.....암도 없슴 ㅎㅎㅎ)
회암사지에서 회암사로 오르는 오르막 산길
회암사지를 둘러보고 회암사 길로 오른다. 비탈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니 회암사가 나온다.
작고 아담한 절인데 아직도 중창불사를 하고있는 중이디..
회암사
회암사전경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 (奉先寺)의 말사인 현 회암사
고승 지공 영정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나옹선사 영정
고려국공민왕사 나옹대화상 (1320-1376)
무학대사 영정
조선국태조왕사 무학대화상 (1327-1405)
회암사지, 회암사를 통틀어서
가장 관심이 끌리고 보존이 잘된 역사적 문화재로서 무학대사 부도라 하겠습니다.(개인적 소견)
(조선시대 부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무학대사의 부도)
무학대사 홍융탑(무학대사의 부도) (보물 388 호) 및 쌍사자석등 보물 389호)
이 부도는 무학대사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부도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이 놓이고 탑신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지공선사 부도비와 귀부(龜趺) - 뒤쪽에 부도및 석등
원래 1387년에 세웠던 것이 도중에 파괴되어 1828년에 다시 조성하였으며
비 옆에는 비신을 올려놓는 흠이 없는 거북받침돌인 귀부(龜趺)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지공선사 부도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봄날 진달래가 햇살에 부시다.
나옹선사 부도탑으로 오르는 돌계단
천보산과 회암사지선각왕사비
회암사지선각왕사비 원래의 모습 보물 제387호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천보산 등산로와 새로 만들어진 모조 碑
구름에 해 가듯한 날씨....선선하여 잠시 숲으로난 오솔길을 거닐었습니다.
한적하고 조용한 사잇길....딱딱한 구두를 신고 걸어도 쿳션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흙길입니다.
혼자서 찬찬히 걷는 여유..... 어디로 난길인지....어디까지나 가야 하는지, 뭐, 그런것 개의치 않고
내키는 만큼 걷다가 그냥 되돌아 오면 됩니다.
다리에 힘을 풀고서 터덜 터덜, 걸어가는 그 오솔길에 이런 저런 상념들,
두팔과 두발이 마치 태견을 하듯 휘척거리며 걷는 발바닥에 작은 충격이 울렁거리면 짓눌리듯한 부담감이나
억지로라도 해야할 어떤 강박감, 깨알같은 순서들이 솔방울이 툭 툭, 떨구어 지듯 가푼함을 가집니다.
그 완만함이 좋은 숲으로난 샛길입니다.
살고지고 함이 다소 불편하다더라도 이만한것만도 감사해 하는 마음이라지요
그랬습니다.
무학대사의 부도탑 언저리에 뒷짐을 지고 찬찬히 산책을 하시는 스님을 봅니다.
무료한 발걸음인지, 아니면 선승의 부도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적멸의 기운을 따라서
맴돌아내는지, 잠시 멈춰서서 먼발치를 무심한 맘으로 우러르는양 .....
그 산책을 훔쳐보는것만으로도 어떤 적요함에 흠칫하네요.
흥興과 망亡....忘에 이르기까지
생生과 사死....초월에 이르기까지.
맨 허허벌판인 회암사지의 폐허터에서 막연히 떠 올려봅니다.
밀어 내거나 빼앗으려는 자와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자들의 다툼질은 예나 제나....
아니 태생적으로 神들의 대리 싸움질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이데올로기에 목숨걸듯 집착하는 편가름이 없어지지 않는한 그 다툼질은 영속하겠지요.
상대를 배려까지는 못할망정 이해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개인적) 바램입니다.
이쯤에서 하늘나라에서^^
G(God) 20 정상회담이 열려야 하겠지요?
헛허허허, 그렇다는겝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회암사지를 우두커니 바라봅니다
좀더 걸터 앉았다 가지나 않고.....하는 아쉬운 손짓이 보여집니다.
포천 출장을 다녀 오는길에 (4.13)
가남에서 양주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회암재)로 우회 하다가
우연하게 지나게된 회암사지 입니다.
그런 저런 절터이거니 하였는데 팻말 표시따라 좁다란길을 거슬러가니
의외로 역사와 이야기가 서린 절터이네요.
잠시 거닐었던 산책입니다.
2012.5.13. 까망가방입니다.
'소소한 일상.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포 들꽃풍경 정모 11회 (0) | 2012.06.09 |
---|---|
신록을 찾아서 - 백운호숫길 (0) | 2012.05.22 |
4월의 봄날 산책.....여의도 벚꽃길, 청계천 (0) | 2012.05.08 |
화순 운주사와 고인돌 유적 (0) | 2012.04.26 |
봄 바다.....초록 바닷길따라....(동해안길따라서) (0) | 2012.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