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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나들이

진도 울둘목과 남도석성

by 까망가방하양필통 2011. 8. 10.

 

진도  울둘목과 남도석성 -   진도 출장길에 2011.7.20

 

 

삼호방조제는

영암군 삼호면의 해안을 막아 바다를 육지로 만든 둑을 이르는 이름이다.

이 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진도에 가려면 목포에서 배를 타던가 영암까지 올라갔다가

해남을 거쳐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도길이 참 멀기만 했었는데

이 방조제가 생겨서 많이 단축되어진것같다.

 

 

 

 

 

좌측에 방조제 준공탑이 보인다.

 

 

 

                                           

 

 

(아래사진 1점은 대청마루님 블로그에서 퍼옴)

준공탑에서 내려본 방조제와 삼호조선소

 

 

방조제를 건너 해남 화원을 거쳐 진도로 향한다.

저만치에 진도대교가..... 진도대교 진입하기전 바로 좌측엔 (해남군) 명량대첩기념관이 있슴

 

 

 

 

진도대교....(익히 아시겠지만^^)

진도군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사이에 놓여진 길이 484m, 폭 11.7m의 국도 18호선인

전국에서 유일한 쌍둥이 사장교로 1984년10월18일 제1진도교가 준공되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5년 12월 제 2진도대교가 개통되고 특히 낙조와 야경이 아름답고 다리 아래의 울둘목 물살은 장관을 이룬다.

 

 

 

기분좋은 날엔 하프줄을 튕기는양  지나기도 하는 경쾌한 다리이다.

 

 

 

진도대교를 지나자 마자 우측에 명량대첩이 있었던

울둘목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의 모형들을 보면서

꽤 오래전에 드라마로 숨죽이게 보았던 "불멸의 이순신" 연속극 장면들이 눈에 생생하게 파노라마 된다.

심명민 이라는 대 스타를 탄생하게한 그 연속극이었던것으로 기억된다.

 

 

 

진도대교는 정유재란때 이순신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랑대첩지 울돌목 위에 놓여 있습니다.

울돌목이란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 이라는 순 우리말입니다.

 

 

 

 

명량해전, 대첩에 대한 小考

익히 아시는 내용이지만 다시금 상기하는 이 대목에서는

언제나 뭉클함과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하기에 여기 저기의 당시 상황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발췌하여  약식으로 정리를 해본다.

나도 모르게 입이 굳게 다물어지고 (앙당물고 라는 편이,,,,) 주먹이 쥐어진다.

 

...............................................................................................................................

 

 

김훈은 그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명량의 바다를 이렇게 표현한다.

                      <명량에서는 순류와 역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였다.>

 

 

그는 애초에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 잃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자신의 바다를 잃고 군사도 잃었다.

전선을 잃고 어머니를 잃고 한낱 병사의 몸으로 백의종군했다.

명량에서의 전투가 있기 직전 다시 삼도수군통사에 올랐지만 허울뿐이었다.

그가 가진 배는 13척이 전부였고, 군사는 겨우 2000명이었다.

 

 

전투가 있기 전날(9월15일) 이순신은 부하 장졸들과 신념과 같은 약속을 한다.

《난중일기》는 그 장면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능히 당해 낼 수 있다 하였는데,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들은 추호도 살려는 생각을 품지 말아라.>

그는 살려는 생각 없이 적의 본진을 돌파함으로써 약속을 지켰다.

 


이순신은 23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그러나 결코 놀라울 일은 아니다.그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첩보와 전술을 집합시켜 기필코 이길 수 있도록 전황을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전선에 올랐다. 
그러나 명량해전은 그렇게 판이 단순하지 않다.

이순신이 꼭 한 번 질 수도 있는 싸움,  오히려 지는 게 당연한 싸움을 했던 곳이 명량의 바다였다.

그 거센 물살 위에서 13척으로 133척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설정이다.

 

적에게도 이순신에게도 물살은 같은 조건을 부여했다.

명량해전의 모든 것은 물 흐름의 순환 속에 있다.

죽음의 자리가 삶의 자리로 변하는 길목도 거기 놓여 있다.

명량의 바다는 아는 만큼 들켜준다.

 

그리고 하오 1시께 썰물이 시작됐다.

물은 서에서 동으로 흘렀다.

전투가 시작되고 줄곧 왜선들의 순류이던 물길이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조선 수군의 순류가 됐다.

조선 수군의 총공세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순신은 적의 함대를 비좁은 명량의 해협 쪽으로 몰아갔다.

물살이 바뀌는 순간 적들의 퇴로도 막혔다.

이순신 함대의 포는 멀리 후미의 왜선을 겨냥했다.

뒤가 먼저 깨진 왜선은 퇴로가 막혀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조각이 났다.

이순신은 13척으로 일본 수군 5만 명이 올라탄 133척을 이겼다.  

적선 31척이 부서졌고,  91척이 파손됐다. 적 8000명이 그 바다에 수장됐다.

 

해질 무렵 전투가 완전히 끝났고, 이순신은 새벽에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그는 명량에 머물고 싶어했지만 물결이 높고 바람은 거셌다.

이순신은 그 싸움의 승리를 두고 단 한 줄의 의미부여만 한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소상히 기록했지만 극도로 말을 아꼈다.

 

 

명량해전의 참패로

서해안을 돌아 서울로 올라가려던 일본 수군의 전략은 좌절됐다.

조선은 잃었던 제해권을 다시 찾았다.

무엇보다 7년 조일전쟁의 결과가 명량의 승리로 윤곽을 드러냈다.

명량의 참패로 왜군의 기본 전략이 무너졌다.

배로 서해를 우회해 한양을 치려던 계획을 폐기해야 했다.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량의 참패 직후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한 줄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순신도 이듬해인 무술년 11월 자신의 전선 위에서 죽었다.

그 바다는 노량이었다.

 

조선의 명줄을 연장한 한 사내의 아름다운 퇴장.

조선이 남긴 역사의 여백은 그 날, 그 바다로 영영 잠겼다.

 

 

 

 

                                                울둘목을 바라보며 잠시 쉼

                                               

 

 

 

 

 

                                  용머리가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유람선이 지난다.

                                 

 

 

 

                                 

 

 

출장

어제 출장을 내려와 

나주 매몰지 현장 대여섯곳에 자재를 분할 배분하고 현장을 둘러보고  오늘 진도로 향하였다.

진도 군내면 지방상수도공사현장사무소를 들러 현장소장과  향후 자재 공급에 대한  협조를 나누고

진도군청에 들러 관계자와  협의를 마친뒤 대리점 사장님과 통화로 진행사항을 열려주니

늦은 오후에 업무를 마쳤다.

 

내일은 김해를 거쳐 울산으로 남은 출장 여정이 있는바 ;;; 

더위에 다소 지쳐진 맘일랑  한적한 곳에 쉬어 머물까 하여 들러본곳이

팽목항 지나서

삼별초의 항몽유적의 사연이 깃든   남도석성이다.

 

 

 

 

관매도....

얼마전 1박2일 프로에 소개되어 유명해진 진도군의 작은 섬이다

그냥 네비게이션을  찍었더니 도로상으로 표시가 안된다는 메세지가 뜬다.

물론 당연하지....헛허허허, 바닷가운데 작은 섬인데....

 

진도섬 팽목항에서 관매도 가는  선편(카페리호)이 연결된다.

 

 

 

 

팽목항 바로 건너편이  서망항이다.

3-4년전쯤에 이곳 공판장에서 싱싱한 오징어를 한짝 샀던 기억이다.

당시 느닷없이 오징어떼가 몰려들어  오징어배가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그때 진도 앞바다에서 오징어가 잡힌다는것을 첨 알았다. 주문진 앞바다에서만 잡히는줄로^^)

최근에 들어서는 오징어가 안잡혀서 오징어배가 저렇게 늘어지고 있다고....

 

 

 

 

 

 

                                                                   

 

 

                                    서망항에서 바라본 건너편 팽목항

 

                                   

 

 

 

                                                                               

 

 

                                    톳을 알랑가?  톳을 널어 말리고 있다.

                                   

 

 

 

                                   

 

 

 

진도 남도석성은

 

삼별초의 몽고 항쟁 근거지로,  팽목항 부근에 위치한다.

사적 127호인 진도군 임회면의 남도삭성은  고려 때 (1270~1273년)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몽고에 항쟁하며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러나 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여겨지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1438년 이후에 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개경의 고려 정부와 몽골군은 연합 토벌대에 의해 섬멸되어진 삼별초군은 제주로 후퇴했으나

이곳 진도 남도석성에서의 치열한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삼별초의 대장이자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배중손 장군은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에 맞서 국가의 자주성을 지킨 대표적 항쟁으로

그들의 항쟁 대의는 분명 외세에 굴하지 않는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와  평가가 계승되어져야 할것이다.

 

 

 

 

 

 

 

 

 

 

 

 

 

 

 

 

서문 누각에 널려진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며루치....

 

   

 

 

 

 

   

 

 

 

 

 

 

 

 

 

 

 

   

 

 

                           당시의 관아를 재현함. 다소 생뚱맞지만....현판하나 없이....

                           성곽안에 문화재 복원하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석성의 남문 앞 작은 개울 위에는  쌍홍교와  단홍교라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성 외곽을 다니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자연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독특한 형태임은 물론 보면 볼수록 기특하고 예쁜 다리이다.

 

바호 그 앞에 얼쩡거렸슴에도 몰랐다.

(아래 사진 1점)

진도에서 재인택시를 하시며 문화해설을 하시는 박효삼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사진임.

 

 

 

 

 

몽고에 대항하던 삼별초義氣를 아직도 성벽의 돌이 기억하는 듯한데....... 

외세의 영욕과 굴욕으로 점철된 역사의 흔적들에서 다시금 숙연해진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작금에 이르러 웬지

삼별초의 그 기상과 자주성을 새삼 가슴에 새겨본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진도사람이 삼별초와 뜻을 같이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남녀 포로 약 1만 명이 몽골로 끌려갔다. 고향땅의 그리움을, 나라 없는 설움을 애달프게 썩히며

고달픈 삶을 이어가야 했다. 슬픈 역사속에 그 넋을  보듬어낸다.

                                                                     

 

 

진도의 또하나의 관광명소로

세방낙조대에서의 일몰, 노을을 감상하는것임인데

아쉬웁지만 갈길이 멀어  발길을 돌려 김해로 향한다.

 

오랫만에 먼길 내쳐온 진도길이었다.

가는 길녁에 .....되돌아 오는 길녁에 잠시 뉘여본 그늘아래 쉬어봄이다.

 

 

길이 거기있어 가는길이라 하매

길따라 가는 맘이 숨결같다 하더라

하니 오늘도 좋은맘이외다.

 

 

2011.  8.  8 정리

까망가방입니다.

 

(정리하면서 좀더 이해를 돕고자 사진과 글을 일부 퍼온곳이 있습니다.

 지적하시면 곧바로 삭제하겠습니다)

 

 

 

댓글 9

  • amabell2011.08.11 00:35 신고

    이 울둘목...명량해전..
    역시 오랫동안 들어도 속이 시원한 장군의 일기,
    그 동상은 서울 중심부에도 있고,
    그 오래전에도 전승을 당당하고 무섭게 왜녀석들을
    그렇게 혼내주었는데,
    오늘의 한일전은 자존심뿐 아닌 분노를 자아내게 해서
    남의 방에서까지
    조금 흥분하고 있습니다.

    답글
    • 까망가방하양필통2011.08.12 00:19

      한일전 축구대회에 참패를 한 속상함일랑
      명량대첩 울둘목 그 소용돌이에서 그 함성으로 자위합니다.

  • 한국의산천2011.08.15 00:32 신고


    파란하늘 푸른바다 참 아름답습니다
    구름은 흐르고 강물도 바다물로 흐르는데 필통님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군요

    블로그를 통해서 몰랐던 역사를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 살구꽃2011.08.15 14:24 신고

    진도대교는 저도 건너봤고
    이순신장군 동상있던 공원
    아마도 진도대교 입구였던..
    그 공원이 생각나요
    초겨울이라 동백이 붉었던 꽃같은 기억이..
    좋은데는 다 다니시는 님
    휴가는 따로 없으셔도 되시지용!!!?

    답글
  • 진도 구경 앉아서 잘했습니다...

    답글
  • 炷垠2011.08.16 20:16 신고

    길따라 가는 맘이 숨결같다 하더라..하니 오늘도 좋은 맘이더라....멋진 글귀처럼
    아름다운 우리강산의 진도를 멋지게 감상하니
    오늘 이시간도 눈과 가슴이 호강합니다^^*

    답글
  • dada2011.08.17 09:32 신고

    운담산방도 좋고..
    세방낙조...그 경이 참으로 좋다는데;;

    답글
  • 소순희2011.08.18 00:15 신고

    충무공 없는 진도는 비어있겠지요.

    답글
  • 청람2011.08.22 12:32 신고

    휴가를 반납한 청람은 필통님의 방에서
    한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
    내어주신 차 한잔과 함께...

    다소 낯선 지역 진도...
    얼마전에 보았던 1박 2일의 아름다운 관매도도 기억나지만
    역사를 되새김해 봄도 좋은 시간이 되네요.
    충무공은 고흥 내발이라는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셨고...

    어느곳을 가더라도 홍교는 참 이쁘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편마암으로 쌓은 다리는 그 섬세함조차도...
    늘~
    사진으로 글로 마음으로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시는 성실함에 감사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