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한바퀴.....여행 일기
2011.8.28.
영월 출장을 몇번 들렸지만 매양 다녀 오기 바쁜터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요.
언젠가 차분히 둘러보리라 하여 지난 여름휴가에 계획을 세워보았지만 워낙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다음으로 미루었던바 이번 휴일엔 하루 날잡아 천천히 또박 또박 들려보았습니다.
산발적으로 기웃거리듯 구경하는것보다는 코스를 잡아 차례로 돌아봅니다.
오늘의 여행코스
경부고속도-영동고속도-중앙고속도-제천 IC-영월 주천을 경유 한반도지형-선돌을 구경하고
영월읍내에 있는 단종의 유배역사를 더듬어 청령포-관풍헌.자규루-장릉을 돌아보고
김삿갓면의 김삿갓 묘소, 김삿갓유적지를 관람하고 찍고 돌아서 상경길에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요선암.요선정을 들러서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을 돌아보았습니다.
중앙고속도
한반도 지형
한반도지형 전망대 오르는길
한반도 윤곽이 보여집니다.
한반도지형 전망대
안개가 설핏한 한반도 지형
안내문과 방문객사진들
- 소재지 :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산 180번지
신기한 산반도지형에 감탄을.....
맑고 청명한 서강의 물줄기는 한반도면 선암마을변에 우리땅을 그대로 복원하듯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처럼 하루빨리 통일이되어 아름다운 금수 강산 곳곳을 자유롭게 구경할 날을 기대해 본다.
동해, 남해, 서해....그리고 아스라히 백두산과 만주 벌판까지 펼쳐진 신기한 지형이다.
숱한 세월 지나치다가 1999년 선암마을 동네주민(이종만)이 우연히 뒤산에 올랐다가 발견을 했다한다.
최근 영월 토박이 사진작가 고주서씨가 무궁화 심기운동도 벌이고 관람객들 사진도 찍어주고 계신다 한다.
도대체 저런곳이 있었나 하면서 사진으로만 보돈 한반도 지형을 실물로 보니 정말 신기하다^^
무궁화꽃 피어나는 한반도.....
한반도지형 좌측 호안 한반도지형 우측 호안
선암마으로 내려가면 뗏목도 체험할수 있다고 한다.
배일치마을
단종이 영월로의 귀양길에서 서산에 지는 해를 보며 한양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던 유적지마을이다.
시원한 그늘아래 마음껏 정담을 나눌 수 있게 정자를 만들어 길손에게 배려하였고,
장승거리에는 다양한 얼굴의 장승을 조각하여 같이 웃도록 하고, 다녀간 기념을 돌멩이에 남기도록한
시골 한적한 동네이지만 정감이 듬뿍가고 가다 머무르는 休를 나누어준다고나 할까^^
" 다녀 가시는 기념으로 이곳에 있는 예쁜돌에 흔적을 남겨주세요."- 배일치마을 주민일동
"
우히히히히~ 해학스런 도깨비^^
귀신은 좀 섬뜩하고 음험한 기운이 들지만 도깨비는 장난스럽고, 엉뚱하고,개구장이 같은 친근감이 있다^^
여태 어지간한 도깨비들을 보아온터지만 여기 배일치마을의 도깨비는 그냥 첫눈에 친구가 된다.
샤방 샤방한 도깨비 처자의 젖가슴을 살짝 보듬어 주고픈 충동질이 불쑥하였건만
도깨비 총각이 식겁^^을 하고 몸을 뒤틀며 꺼이 꺼이 안달을 하는통에...... 걍 곁눈질만 ㅎㅎㅎㅎㅎ
선 돌
선돌은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하며
날골과 남애마을 사이에 높이 70m 정도의 큰바위가 서있는데
푸른 강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소재지 : 영월읍 방절리 산 122번지
영화 "가을로" 촬영이이기도 한
선돌을 지나 영월 읍내에 이르다.
영월은 단종의 비애를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들이 남아져 있는곳이다
유배지 청령포
그리움과 회한을 달래었던 자규루
끝내 사약을 받았던 관풍헌
그리고 우여곡절로 장릉에 묻힌.....그 역사의 현장이다.
그간 간헐적으로 들려보았던 터지만, 이번엔 순서적으로 천천히 그 자취와 애환을 돌아본다.
청령포
- 소재지 : 남면 광천리 산 67-1
북,동,남쪽 삼면이 깊은강에 둘러싸이고 서쪽(뒤켠)엔 육육봉이 험준하여 천혜의 유배지이다.
청령포 나루에서 바라본 청령포
청령포 숲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나중에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종과 배알하는 신하를 묘사한 밀납인형
보초를 서는 졸卒
관음송 (觀音松)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노산대
이곳에서 한양쪽울 우러러 그리움의 회한과 비애를 느끼고 외로움과 무서워 했을....
노산대에서 바라본 절벽 - 영월 서강이 유유하게 흐른다
열입곱살의 단종은 이곳 깎아지른 절벽의에서 한양쪽을 우러러
그리움의 회한과 비애...그리고 자괴감마져 떨구며 그 외로운 속박에 무서워 하였을것 같다.
청령포...... 그 것은 이나라의 역사이자 권력의 속성을 느끼며 무상해 한다.
무궁화호 기차가 지난다....골짜기에 우람하게 진동이 되는
청령포를 뒤로하고.....
관풍헌과 자규루
관풍헌(영월 동헌) - 오른쪽 건물이 관풍헌
이곳에서 사약을 마시고 열일곱살에 유명을 달리하다.
자규루
「단종의 ‘자규시(子規詩)’」
一自寃禽出帝宮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
假眠夜夜眠無假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窮恨年年恨不窮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이하 생략)’
단종은 자신의 신세를 하염없이 우는‘소쩍새’에 비유하며 이 시를 썼다.
신하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비통함과 왕비에 대한 그리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처량함이 모두 담겨 있는 듯하다.
왕방연 시조비 또한 그냥 지나칠수 없는곳으로 (청령포 건너편에 위치)
1457년 10월...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전하고 한양으로 가는길에 애틋함을 읊은 시조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 놋다
(아래사진 내가 사랑하는 세상 블로그에서 퍼옴)
소재지 : 영월읍 영흥리 1086,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사약을 받고 승하한 관풍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남겼던 자규루,
그리고 주검이 묻힌 장릉 등에서 생생한 단종의 한과 넋을 느끼어 본다.

(위 사진 1점은 영월관광 홈피에서 옮긴사진임)
세계문화유산 등재(2009.06.27)
17세의 어린나이에 사약을 받고 승하한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능이다.
단종은 부왕인 문종이 일찍 죽어 12세에 임금이 되었으마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세조3년) 결국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셨을 때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자 영월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모신 곳이 바로 장릉이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게 한다.
제 실
정려각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이다.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매년 한식날 단종제향후 제사를 지낸다.
1698(숙종24년)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영조 9년에 비각과 수복실, 정자각을 세웠다.
비석전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쓰여있다
제단과 영천
정조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 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다

한식날인 단종제향때 제물을 올리는 곳으로 정자각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 한다.
(현재 보수중임)
장릉에서 내려다본 정경 - 단종비각, 배식단사,보수중인 정자각등이 보인다.
장릉의 석상
릉의 전면에는 왕릉으로서는 왜소하고 석물중에 武臣(무신)상이 없다는것도 좀 그랬다.릉의 뒤켠에서 시야를 굽어보며 .... 체념과 포용이라는 단어가 스쳐난다.
장릉의 숲
숲의 소나무가 단종의 능을 향해 굽어져 있다는데....
엄흥도 사당
후손들이 건립한 호장 엄흥도의 사당과 조형물(장릉과 담장을 두고 이어져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엄흥도 象
잊혀지고 왜곡된 단종의 역사를 바로 잡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건립된 단종 역사관은 단종의 즉위식에서부터
사약을 받는 모습 등 단종의 일대기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연대기식으로 모형전시되어 있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 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임금께서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장릉에서 나와 지나는 길에서 봄^^
라디로스타 촬영장소였던 모텔이라 합니다.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과 철없는 락가수 박중훈과 속깊은 매니저 안성기가
만나서 버무린 따뜻한 세상의 행복한 이야기
기뻐서 눈물이 나고 슬퍼서 웃음이 나는 이 영화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말합니다
“때론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나를 최고라고 말해준 당신이 있어 나는 행복합니다”
라디오스타 ....2번 본 영화입니다. 우리시대의 추억이 스며졌기에 감명깊게 보았던 ^^
영월 읍내를 돌다가 문득 발견한 팻말이 반갑고 신기해서 한컷 찍었습니다^^
동강 사진박물관
소재지 : 영월읍 하송리 217-2
영월은 2001년 9월 1일 '동강사진마을'을 선언하고 2002년 여름 '동강사진축전'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국내 사진문화의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잡아 가는것 같다..
이 곳 영월에 사진박물관을 건립함으로서 동강사진마을-동강사진축전-동강사진박물관으로 이어지는
문화관광의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여진다.
동강사진박물관은 "이런곳이 있구나" 하여 시간관계상 겉모습만 둘러보고 나서다
영월 읍내를 벗어나서 김삿갓면으로 향합니다.
김삿갓유적지, 문학관 가는 길이 넘 말끔합니다.
지난번 출장길에도 지났던 그 길들이지만다시금 역사의 오랜 숨결을 차분하게 느껴내는터 .....길따라 가는길에 잠시 머무러 한개피 사루어 그늘의 여유를 가져봅니다.
김삿갓면 가는길
김삿갓 유적지와 문학관
소재지 : 김삿갓면 와석리
난고 김삿갓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썼다는 자책감으로 평생 방랑 시인을 지낸 방랑시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김삿갓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다.
김삿갓 생가와 묘소가 있는 유적지
바위에 새겨진 化去竹 詩調
김삿갓 시를 새긴 비석과 조형물이 있는 작은 공원
아담한 작은 공원이다.
김삿갓 묘
난고 김삿갓문학관
김삿갓 유적및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곳에 김삿갓문학관이 있다.
김삿갓 문학관앞에 공연장
방랑시인 김삿갓.....
전시관
생가 모형
김병연(金炳淵)1807년(순조 7)∼1863년(철종 14).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양주 출생.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에 오른다.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57세로 운명할 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하였으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제로 락운성시(落韻成詩)하였다.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아래 사진은 김삿갓의 생애를 조명한 영상을 찍은것임)
김병연이 쓴 시는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었습니다.'홍경래의 농민 봉기 때 가산 군수 정시의 충절된 죽음과 하늘에 통탄할 김익순의 죄를 논한다'였습니다.
고뇌와 방황....그리고 정처없는 길을 떠남....
방랑시인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든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방랑과 사연따라 ....노래따라 그 영상을 디카로 찍었다^^
판화는 몇번 찍어보았지만 탁본은 첨으로 찍어본다.(관리하시는분께서 기념으로 한컷 찍어주시다)
此竹彼竹 化去竹 (차죽피죽 화거죽) :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打之竹 浪打竹 (풍타지죽 랑타죽) :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粥粥 生此竹 (반반갱갱 생차죽) : 밥이면 밥 죽이면 죽 나오는 대로
是是非非 付彼竹 (시시비비 부피죽) : 옳고그름은 따지지 말고 그저 그런대로
賓客接待 家勢竹 (빈객접대 가세죽) : 손님접대는 집안형편대로
市井賣買 歲月竹 (시정매매 세월죽) : 물건사고 파는 것은 시세대로
萬事不如 吾心竹 (만사불여 오심죽) : 만사는 다 내맘대로만 못하니
然然然世 過然竹 (연년년세 과년죽) :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가세
이제 어느정도 시간도 늦어가고 하여 서울길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돌아가는길에 수주, 주천쪽으로 강따라 가는길에 마지막 코스로 법릉사 적멸보궁에 들러서
나오는길에 요선암에 들려볼 참입니다.
주천강
길가 풍경 숲속의 오토캠핑장
사자산 적멸보궁 법흥사
법흥사
- 소재지 : 수주면 법흥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보궁 중의 하나이다.
법흥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한 흥녕사 절이다.
당시 징효대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진신사리 100과를 얻어다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등에 나누어 봉안하고, 이곳에 적멸보궁형 법당을 세웠다.
법흥사 원음루
대웅전
적멸보궁
자장율사 토굴과 사리탑 (적멸보궁 뒤켠)
예를 갖추는 법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경건한 맘으로 묵념을 하고 잠시 쉬어 머무른다.꼭 그런건 아니지만 아직 가보지못한 정선에 있는 정암사의 적멸보궁도 언젠가엔 들려보고 싶다.
적멸보궁은 웬지 더 적요스럽다는 ...그런 느낌이 든다.
법흥사를 나와서 주천면 쪽으로 나오는 길에 요선암, 요선정을 들린다.
주천강(요선정. 요선암)
요선정 오름길...역시 적요스럽다. 찬찬히 푹신한 소롯길을 오른다.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강 기슭 큰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라 새긴 刻字(각자)가 있다.
邀僊(요선) 또는 邀仙(요선)이라 쓴 글씨의 뜻은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정자 주변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작은 석탑 1기가 남아있다.
무릉리 마애불좌상

요선정
요선정 앞에는 치악산에서 흐른 물이 옛 흥녕선원지 앞을 지나는 법흥천과 합류하여 맑은 계곡을 형성하고,
깊은 물이 흐르는 강바닥에는 물에 씻긴 큰 바위들이 넓게 깔려있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다.
이 글씨는 조선시대 시인이며 서예가인 楊蓬來(양봉래)가 평창군수 시절 선녀들과 함께
이곳에와 일대의 경관을 즐기다가 새겨놓은 글씨라 전해오고 있다.(그런데 요선암이라 각인된 바위를 두리번 거렸으나 찾지 못했다....물어볼 사람도 없고....ㅠ.ㅠ ^^)
주천강 요선암
장마철에 물이 불어선 탓인지 다소 뿌연 뻘이 묻어진체.... 남아져 있기도....
요선암.....
그 억겁의 세월을 씩시고 또 씻겨서.....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자연의 침식작용에 의한 생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표현이 턱없다는 생각이 앞선다.맑은 물살이 틈새 사이로 요모조모 감겨 돌며 하얀 포말을 튕긴다.
그냥 덜썩 주저 앉아 ,,,,, 가만히 있는것만으로도 맑아지는 기분이다.노을이 주천강과 요선암을 비껴간다면 그또한 환상일것 같다.(마음 같아선 노을이 비칠때까지 머무르고픈데 ....시간상 이제 상경하여야 할듯)
오늘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 하는양 요선암 너른 바위에 두다리를 쭈욱 뻗어 앉아서 피부에 저미는 알싸한 시려움을 청량감으로 가슴에 안아낸다.
좋다...그냥좋다.흥얼거려지는 동요에 갈길 몰라 하는맘이러라.
흐르는 시냇물에 종이배를 띄우면 흐르는 냇물따라 내마음도 흐른다 흘가는 종이배 내마음 싣고~
영월 한바퀴.....영월 여행 가실때 참조가 되어졌으면 하는 바램에서 사진을 코스별로 찍어보았습니다.영월과 정선은 우리에겐 오지로 알려진 곳이지만 그만큼 맑은 계곡과 강과 산수가 어우러진 곳입니다.
새벽녁에 나선 작은 여행이었습니다. 하루 코스로 다소 빠듯 하였지만 가족과 함께 역사속에서 하루를 머무르며 차근 차근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괜찮은 여행이라 하겠습니다.
2011.8.28. 일. 영월 한바퀴
까망가방입니다.
참조 - 영월 관강지별 이동시간 안내도
'소소한 일상.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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