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공동묘지 ( 망우 역사문화공원) 2024.3.16
망우 역사문화공원을 탐방하였습니다.
2015년 1월에 다녀간 뒤로 10년이 지나 다시 방문하였는데
초입에 "망우공간" (전시실및 카페, 미디어관람공간등) 이 새로이 건축되어 있고
셔틀버스도 다니는등 안내및 관람 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현재 명칭은 "망우 역사문화공원"으로 개칭 되었지만 제 기억엔 아직도
"망우리 공동묘지" 로 각인되어 남아있네요.
망우리 공동묘지 ( 망우 역사문화공원 ) 개요
망우리 공동묘지가 일제 감정기에 조성된 것은 1930년대 들어와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자 주택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를 비롯하여
서울 근교의 이태원, 아현동, 금호동, 노고산 등의 공동묘지를 이장시키고자
1933년 6월에 전체 75만 평 규모에 묘역만 55만 평을 마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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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전쟁의 상처 속에서 시내 곳곳에 가매장으로 묻혀있는 시신을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 이장을 하였기에, 그렇게 전쟁으로 생긴 상처까지 보듬었다.
개장 이래 50년 간 약 2만8000 기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1973년에는 더 이상 빈 공간이 없어 폐장되었다.
일제시대에 조성된 망우리공동묘지
1973년도 망우리공동묘지
새롭게 변화하고 부각되는 망우리공동묘지
1990년 대 후반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의 추모비가 건립되고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지속적으로 열리면서 역사적인 장소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마침내 2013년 이 일대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추모공원이자 역사와 문화 공간인 "망우역사문화공원" 으로 변모하였다..
망우(忘憂) 의 뜻과 유래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넘던 태조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리면서
태조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걱정(우·憂)을 덜었다(망·忘)” 고 말했다.
후대는 태조가 근심을 잊은 이 고개에 ‘망우리 고개’ 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전시실
망우리공동묘지 묘적대장
인물광장 ( 이곳에 안장된 주요 인사들 )
이곳 망우리 공동묘지(망우역사문화공원) 에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와 예술인 사회저명인사 명단
1부 그 잎새에 사랑의 꿈
1 시를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난 ‘목마’ - 시인 박인환
2 동화 속으로 떠나간 아이들의 산타 - 소파 방정환
3 ‘꿈을 찍는 사진관’의 주인 - 아동문학가 강소천
4 한국 근대 유화의 슬픈 자화상 화가 - 이인성과 이중섭
5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 조각가 권진규
6 이념의 벽 앞에 잊힌 문인 - 함세덕과 최학송
7 가사가 세 번이나 바뀐 노래의 주인 - 작곡가 채동선
8 낙엽 따라 가버린 ‘오빠’의 원조 - 가수 차중락
9 한국 야구의 원조 ‘호무랑’ 타자 - 야구인 이영민
10 비운의 영화인이 부른 ‘밤하늘의 부루스’ - 영화감독 노필
11 여성 최초의 예술원 회원 및 기독교 장로 - 끝뫼 김말봉
12 망우리공원의 문인들 - 김상용 김이석 계용묵 이광래
2부 이 땅의 씨앗과 뿌리
1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 지석영과 오긍선
2 개화에 앞장선 근대 최고의 서화가 - 위창 오세창
3 ‘조선의 마음’을 일깨운 사학자, 언론인 - 호암 문일평
4 독특한 국어학자였던 조선의 변호사 - 학범 박승빈
5 망우리의 조선어학회 3인방 - 신명균 박현식 이탁
6 한글을 연구한 애국지사 - 지기 문명훤
7 한국 민속학의 원조 - 석남 송석하
8 한국 식물학의 선구자 - 서울사대 교수 장형두
9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 소오 설의식과 그 가족
10 대한민국 엔지니어의 선구자 - 대한중석 초대 사장 안봉익
11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 제2대 관상대장 국채표
12 우리나라 방송계의 선구자 - 노창성, 이옥경 부부
13 대한변호사협회 초대회장 - 최병석
3부 겨자씨 한 알의 믿음
1 100년 만에 찾은 유관순 열사의 묘 -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
2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동기 - 여경국장 김분옥
3 동아일보의 초대 주필 - 설산 장덕수
4 경기여중고 15년의 교장 - 난석 박은혜
5 도산 선생의 발치에 묻어다오 교육가 - 추담 허연
6 한국 최초의 기독교 유아 세례자 - 송암 서병호
7 함북 성진의 3·1운동을 이끌다 - 목사 강학린
8 초교파 만주 조선기독교회 창립자 - 목사 변성옥
9 한국 최초의 몰몬교 신자, 콩 박사 - 영양학자 김호직
10 크리스천 홈의 태양 MRA 운동의 개척자 - 이경숙
11 전도부인 어머니와 독립지사 아들 - 주룰루와 김명신
12 한복을 입고 이 땅에 묻힌 일본인 - 민예연구가 아사카와 다쿠미
13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심다 - 총독부 초대 산림과장 사이토 오토사쿠
망우 역사문화공원 초입에 있는 인물광장 좌측에
이태원 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및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 가 있습니다.
유관순 연보비 와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유관순 연보비에 새겨진 유언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수 있사오나,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건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 입니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와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
망우리 공동묘지가 일제감정기에 조성된 것은 1930년대 들어와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자 주택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를 비롯하여
서울 근교의 이태원, 아현동, 금호동, 노고산 등의 공동묘지를 이장시키고자 마련한 것이었다.
기존 공동묘지의 무덤을 이장할 때 연고가 없는 무덤은 화장한 뒤 망우리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이때 이태원 공동묘지에는 2만8000 기의 무연고 묘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안타깝게도
유관순의 묘도 들어 있었다.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우네장터 만세운동 때 사망하였기에
유관순에게는 당연히 연고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 아래사진 )
1938년 서울 서쪽 노고산(서강대 뒤)에 있던 공동묘지가 택지개발로 없어지면서
무연고분묘를 망우리로 옮기고 세운 비석입니다. 비에 새겨진 제자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의 글입니다.
좌측은 시멘트로 보수를 한 현재의 모습. 우측은 보수전 사진
웬지 더욱 측은한 기분이 드는것은 보수를 할때 시멘트로 발라놓은 무성의함이 느껴집니다.
조금 더 신경써서 허물어진곳을 자연석으로 보수를 하였더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 (망우역사문화공원) 의 묘지들
그나마 후손이 있어서 관리가 되어지는 묘소도 있지만 상당수의 묘소는 봉분이 허물어져 있다.
아래 돌무덤과 꽃은 봉분이 아니고 이장하고 난뒤 빈터에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것임
사용기간을 연장하지 않은 무연고 묘지 ( 관리가 안되어 봉분이 허물어져 가고
잡풀에 덮여진 묘소) 가 해마다 늘어가면서 묘지수가 줄어 들고 있음
다소 씁쓰레한 기분이 드는 풍경 (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았슴 )
묘지 상석에는 떡, 전, 사과와 배 그리고 막걸리등의 제수가 정성껏 차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허연 백발의 두 노인네 두분만이 묘소 주위를 맴돌며 살필뿐 젊은 사람이 한명도 보이지 않아서
불연, 저분들 돌아 가시면 누가 정성으로 묘소를 돌봐 줄까나.....그런 생각이 미치네요....
孫 이라는 개념이 급격히 희박 해지는 현상을 받아 들여야 함은 어쩔수 없는 현실입니다.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 사잇길 ( 묘소 안내도 )
묘소 주변에 세워진 연보비
서병호. 서동일 연보비
조봉암. 장덕수 연보비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연보비
2012년에 만해 한용운 묘소가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었고
2017년에는 위창 오세창 등 독립유공자로 애국훈장이 수여된 여덟 분의 묘가
등록문화재 제 691호(1-8)로 일괄 지정되었다.
만해 한용운 묘소와 시비
중랑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오세창. 문일평 묘소
개화에 앞장선 근대 최고의 서화가 - 위창 오세창
‘조선의 마음’을 일깨운 사학자, 언론인 - 호암 문일평
지석영. 민예연구가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묘소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 지석영
한복을 입고 이 땅에 묻힌 일본인 - 민예연구가 아사카와 다쿠미
소파 방정환 묘소
동화 속으로 떠나간 아이들의 산타 - 소파 방정환
도산 안창호 가묘 ( 도산공원으로 이장후 가묘설치 ). 조벙암 묘소
계용묵. 차중락 묘소
백치 아다다의 계용묵
낙엽 따라 가버린 ‘오빠’의 원조 - 가수 차중락
산책로및 박인환 시비
박인환 묘소
시를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난 ‘목마’ - 시인 박인환
2024. 3. 20일 박인환시인작고 68주기 추모식
제가 방문한날은 3.16일이었음. 아래 사진은 옮긴 사진임
이중섭 묘소
화구를 살 돈조차 없을 만큼 궁핍하여 담배를 싼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꼽히는 작가이다.
아래 비석의 문양은 두 아들을 상징한다고 함
국민 강녕탑
용마산과 아차산 지킴이로
수십년간 산속 쓰레기를 주워 온 83세 최고학 옹이
국민의 행복을 염원하며 쌓은 탑이라고 함
무궁화 동산길과 용마 약수
둘레길과 사잇길 그리고 묘소를 돌아 보면서 마른 먼지를 마신 탓인지
목도 컬컬하였는데 이곳 용마 약수에서 목을 추기었음
숲속 사잇길
공원 묘지에 둘레길도 있지만 소롯길로 숲을 가로지르는 사잇길이 있다.
사색을 하면서 걷기 좋다고 하여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 기념탑.(옮긴 사진임)
일제가 강점하기 직전의 항일 의병이었던 창의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창의군은 1907년 11월부터 1, 2차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 부족과 중과부적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실패했다.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물로 지정되었다.
(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다녀와서 포스팅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 망우리 공동묘지 " (망우 역사 문화 공원) 은
의외로 근세시대의 역사와 문화, 시대적 풍경을 유추 하여볼수 있는
소중환 문화 유산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치욕과 억울한 분노가 거기 한으로 서려 있고
6.25 동란의 뼈아픈 슬픔까지 더불어 안고 있는 공동묘지 입니다
망우 역사문화 공원 ( 망우리공동묘지 ) 를 둘러보고서
2024. 3. 23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p.s 귀신 만화 - 가슴을 울리는 공동묘지 사랑